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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泰赫

‘ヅルシネアの森’ - ‘Forest of Dulcinea’ 둘시네아의 숲

201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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写真関連の仕事を始めたかが来年20年になっていく。
日本に来ては、第六の夏を過ごしている。
その中に多数のコンセプトやインテリアを悩んで実験してみたが急速に変化する時代だけだから、常に新しいことを発見することは容易ではない。
もちろん、常に新しくなければするものではない。そして、必ず新しいだけでは良いとすることもないだろう。
ので、常に悩みがされている新しさは、私に投げる質問である。

今のライフスタジオと一緒にもう一つの挑戦を開​​始し、私に戻って新たなことへの質問をするようになった。
そして私の中にどこかにあった想像のかけらが彼女を思い出させる。

「私たちに最も身近なファンタジーは定義の守護者となって愛するお姫様を求め、周囲の人々にうたわれる夢を見ること。
または誰かの命をかけた愛を原動力に冒険と想像が広がるした中に、美しい姫である私が存在することを想像である。
それ風車と対抗戦わなければなら少し無駄な夢であっても、私たちはそのような想像をすると、満足してなる。さらに、その主人公が私たり、あるいは私が愛する近い人々である場合には、なおさらである。
いくつかの記事には、世界で最も美しい想像の女性は彼女がまさにヅルシネアである。
そして、その女性のために命をかけた無謀な戦いをする白馬に乗った記事はドン・キホーテである。

白雪姫やシンデレラに出てくる金持ちだが、別の特異点のない王子より奇妙な行動がドン・キホーテに、より好感を持つ理由は、他の王子が持っている高い安定性ではなく、私たちは常に脱する現実の無謀な挑戦をするだろう。そして、これが、より積極的な愛と冒険、想像をすることができ接触だろう。

ドンキホーテはどのような苦難がダクチも貧しくて台を受ける者を助け、高い人に打ちひしがれた者、すべての悔しい者救っ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る。そして、世界が彼を適宜もぐっている場合は、罪がされるとし書斎を蹴っていく。
彼の目には旅館が城に、売春婦が王女に見える光であるである。しかし、唯一の光であると片付けいうあまりにも定義である。
売春婦と姫を均等に見ること、売春婦と姫を差別すること、どちらが正常なのか。
「放浪の記事の騎士道というのは、愛の道理と同じで、すべての仕事や人を平等に見ることがはい。」とドンキホーテは言う。
既得権の洗練された包装紙である「異性」の観点から見れば、私のことあなたのこと選ばない「狂人」は、不慣れ危険な打者でしかないだろう。
しかし、ミシェル・フーコーが「狂気の歴史」でお話したように、このような光であるの束縛も不条理な世界が作られた札日だけ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を知った時、私たちは真の愛の可能性を見ることになるのではない?

小説の中で、肝心のドンキホーテ自分は救いの女性ヅルシネアに会わない。
ヅルシネアはすぐ近くにありますが、目に見えないその何、すなわち、人間の心を表現したものだからである。
ヅルシネアはドンキホーテの定義の変わらない信念であり、束縛されない自由魂を称える比喩存在だったのだ。
ので、姫と王子の出会いが行われることが結末になることがなく、絶え間ないだろ自分に勝ち、守っていく揺れないプロセスのみが存在することになる。
これは、決定論的世界観に浸って運命を待っている受動的な人生だけが、通常のように思われる現実を真剣に質問を反映している。
風車との戦いでくたびれたドン・キホーテを連れてきた山椒が村の人々にドンキホーテの行動を説明する文章では、これらの意図がより明確になる。
「他人の腕になって敗北したものの、彼は自分自身を勝ち帰ってきた息子だね。彼によると、自分に勝つことが人間に望むことができる最も大きい勝利というゴルセ。 " 」

ヅルシネアの森は、まさにこのような定義と普遍的な愛の信念に基づいて、自由魂を持つ人々の冒険と想像を広げるスペースであることを夢見てみる。
また、あなたと私の境界を崩し、新しい関係を介して作成された人への愛が記録されている空間を切望するライフスタジオの想像を実現しようとする意志の表現が感じられる空間であってほしいならない。

これからも使えない文だが、ブログを通じて、私たちの想像を作っていく過程を残してみようと思う。


사진관련한 일을 시작한지가 내년이면 20년이 되어간다.
일본에 와서는 여섯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
그 동안 많은 수의 컨셉과 인테리어를 고민하고 실험해보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만큼이다 보니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항상 새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꼭 새로운 것 만이 좋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항상 고민이 되는 새로움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제 라이프스튜디오와 함께 또 하나의 도전을 시작하면서 나에게 다시 새로운 것에 대한 질문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내안에 어딘가에 있던 상상의 한조각이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환타지는 정의의 수호자가 되어 사랑하는 공주님을 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꿈을 꾸는 것.
또는 누군가의 목숨을 건 사랑을 원동력으로 모험과 상상이 펼쳐지는 한 가운데에 아름다운 공주인 내가 존재하는 상상 일것이다.
그것이 풍차와 맞서 싸워야 하는 조금은 헛된 꿈일지라도 우리는 그런 상상을 하면 흐뭇해 진다. 더욱이 그 주인공이 내가 되거나 혹은 내가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들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한 기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상의 여인 그녀가 바로 둘시네아이다.
그리고  그 여인을 위해 목숨을 건 무모한 싸움을 하는 백마 탄 기사는 돈키호테이다.

백설 공주나 신데렐라에 나오는 부자이지만 별 특이점 없는 왕자보다 이상한 행동을 하지만 돈키호테에게 더 호감을 가지는 이유는 다른 왕자들이 가지고 있는 안정됨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벗어나야 하는 현실에 대한 무모한 도전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좀 더 능동적인 사랑과 모험, 상상을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돈키호테는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가난하고 천대받는 자들을 돕고, 높은 사람에게 억눌린 자, 모든 억울한 자를 구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이 그를 원하는데 꾸물거리고 있으면 죄가 된다며 서재를 박차고 나간다.
그의 눈엔 여관이 성곽으로, 창녀가 공주로 보이는 광인이다. 하지만 단지 광인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정의롭다.
창녀와 공주를 동등하게 보는 것, 창녀와 공주를 차별하는 것, 어느 쪽이 정상일까.  
"방랑 기사의 기사도라는 것은 사랑의 도리와 같아서 모든 일이나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네." 라고 돈키호테는 말한다.
기득권의 세련된 포장지인 '이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는 '광인'은 낯설고 위험한 타자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같은 광인의 굴레도 부조리한 세상이 만든 꼬리표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 정작 돈키호테 자신은 구원의 여성 둘시네아를 만나지 못한다.
둘시네아는 바로 가까이에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즉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시네아는 돈키호테의 정의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념이며 속박 받지 않는 자유혼을 일컫는 비유적 존재였던 것이다.
때문에 공주와 왕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결말이 될 수 없고 끊임없지 자신을 이기고 지켜나가는 흔들림 없는 과정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결정론적 세계관에 젖어 운명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만이 정상처럼 여겨지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반영한다.
풍차와의 싸움에서 녹초가 된 돈키호테를 데려온 산초가 마을 사람들에게 돈키호테의 행동을 설명하는 글에서 이러한 의도가 좀 더 명확해진다.
"남의 팔뚝에 져 패배하긴 했지만 그분은 자기 자신을 이기고 돌아온 아들일세. 그분 말에 따르면 자신을 이기는 게 인간에게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승리라는 걸세." 』

둘시네아의 숲은 바로 이러한 정의와 보편적 사랑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유혼을 가진 사람들의 모험과 상상을 펼치는 공간이기를 꿈꾸어 본다.
또한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기록되는 공간을 갈구하는 라이프스튜디오의  상상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 느껴지는 공간이었으면 한다.

이제부터 잘 못쓰는 글이지만 블로그를 통해서 우리의 상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남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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