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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WooKyu
大阪1号店

朴禹圭(Park)

(lifeschool)ソフィーの世界 – 下 - 韓国語

20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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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철학 문제에 관한 한, 그 해답을 규명하는 쪽보다 문제를 제기하는 편이 훨씬 쉽지.

 그러나 그 쉬운 질문도 낫선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옳게 존재하는 것인가? 선천적 이성이란 존재 하는것인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있을까? 등등...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해답을 규명하기는 커녕, 생각해 보면 매우 궁굼한 질문을 해보지 조차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둔감하고 무관심한 존재로 만든것인가? 원인은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세계는 아기가 제대로 말을 배우기 전에, 또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기 훨씬 전에, 이미 아기에게 익숙한 세계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기도 전에 이미 그것은 그런것으로 굳어진다. 이유는 필요없다. 그냥 그런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과율이라는 결정적인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냥 그런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질문의 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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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우리는 크게 두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생각해 보기로 했다.

번째 주제는 "세계는 내가 감각을 통해 보는 것과 똑같다고 확신할 있는가?"이다.

 간단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나의 감각을 믿지 못한다면 어떠한 것을 믿겠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 만은 아니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것은 변화한다. 3초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다만 속도가 너무 느려서 감지하지 힘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방금 내가 인식하는 무엇인가가 지금에도 그대로 똑 같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렇게 꾸준하게 변하는 세상의 일부분을 우리가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방금 불었던 특정한 비눗방울을 자세히 관찰하여 특성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 할까? 아니 의미가 있을까? 세상만 변하는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각 능력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이렇듯 시간이라는 개념에 지배를 받는 현재의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또 공간에 대해서도 우리는 감각한 것의 일정한 기준을 만들기란 어렵다. 중동 지방에서 사용하는 터번과 극지방에서 사용하는 털모자는 모양과 사용방법은 비슷하지만 그 용도와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단순히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는 자기 주관적이고 자신이 속해있는 지역과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

 그 뿐 아니라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감각의 인지는 달라진다. 흔히 우리는 보이는데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데로 본다고 많이 말한다. 이 말안에 우리가 인지하는 감각의 불확실성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의 이성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완벽하게 그 존재를 그 존재 자체로 느끼기도 어렵고 그런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렇듯 우리가 감각하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시간, 공간, 개인특성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커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감각이라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부정확성을 인지하고 감안하여 그 감각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만 올바른 이성을 찾아가는데 적당한 재료로서의 감각인가 아닌가를 판단가능성이 생길것이다. 그럼, 색안경을 우리의 눈에 적당한 도수의 안경으로 또는 그 안경을 최대한 제거한 상태로 감각인지를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시간, 공간, 개인특성등을 모두 고려하여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은 쉽지 않다. 아마도 부처, 공자, 예수등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현자 정도는 되어야 그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나와 같은 범부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생각한 한가지 방법은 "다양성의 인정"이다. 간단히 말하면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은 참 쉽지만 사실 쉬운 행동방법은 아니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점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되는 것에서 그 원인을 많이 찾아 볼 수있다. 앞서말한 시간, 공간, 개인특성등의 아집이 생각보다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것을 타인이 틀린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팽배해있다.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다. 이러한 다양성의 인정을 통하여 조금은 감각인지를 정확히 하는 단초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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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째는 무엇에 의해 도덕의 기준이 정해지냐?이다. 칸트는 보편적 도덕이란 경험 이전에 정해져 있고 인간은 그것을 찾아갈 있다고 했던 반면 마르크스는 사회의 하부 구조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했다.  앞서 말한것과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것은 불완전하다. 그 경험이 귀중한 재료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기에는 객관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말한 유물론은 경험적 요소가 강하고 그러한 경험론으로는 기준을 만들 수 없다. 물론, 마르크스가 말한 " 사회의 정신적인 상황이 물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물질적인 상황이 정신적인 상황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특히 사회의 결정적인 힘이 다른 모든 분야에 변화를 일으켜 역사를 발전시킨다."가 틀린 이야기는 아니고 우리는 실제로 이러한 경험을 하며 그러한 역사를 보아왔다. 그리고 마르크스도 하부구조만이 상부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의 경우에는 영향이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중의 문제에서 하부구조를 너무 높은 곳에 올려 놓았다. 꾸준하게 발전하며 변화하는 법칙을 우리가 따라야할 기준이라고 말할 수있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변화할 법칙을 따라야 할까? 따라야 한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비약이라고 생각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도덕의 기준이 크게 변한다면 예를 들어 2058년 부터는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괴롭혀도 된다고 한다면2057년에는 안되는 것인가? 정확한 기간이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큰 변화를 경험한적이 있는가? 아마도 표현방식의 변화와 표현방식의 왜곡은 역사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앞서 말한것과 같은 엄청난 변화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적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비슷하다. 사하라에 살던 알레스카에 살던 우리에게 적용되는 큰 도덕의 기준은 비슷하다. 대부분 도덕 기준의 원칙은 황금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개인의 특성에서도 비슷하다. 소크라테스가 말한것과 같이 우리는 모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게 행동하는지 알고있다. 다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불완전한 경험 이전에 도덕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칸트를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어떠한 행위를 하기 전에 그것이 옳은가에 대하여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법칙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법칙은 모든사람에게 보편타당해야한다. 그래서 모든 경험적 요소가 제거된 선천적 원리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판단만이 앞서 말한 시간, 공간, 개별적특성등의 자연법칙으로 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 그러한 판단 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도덕법칙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개별적사안에 따라서 조건적으로 법칙이 적용되는것을 가언명령이라 하였고 선택적인 사안에 따라 법칙이 적용되는것은 선언명령이라 명명하였다. 이름을 어떻게 붙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법칙은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거나 여러가지 선택 중에서 하나가 아니라 정해져있는 하나의 기준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그것을 정언명령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정언명령은 무엇일까?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다.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기를 네가 동시에 바랄 수 있는 그런 준칙만을 따라 행위하라.

 간단히 말해서 이때 준칙의 기준은, 그 행위의 기준이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롤스의 예를 들면 이해가 쉬울 수도 있겠다. 롤스는 우리가 미래 사회의 모든 법률을 만드는 위원회의 의원이고 우리는 법률을 만들자 마자 죽는다. 그리고 바로 다시 태어나는데 어떤지위, 어떤성별, 어떤장소등등을 알지 못하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법을 만들게 될까? 이러한 개념의 목표는 평등을 주창하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칸트를 이해하는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언제나 목적 자체로서 대해야지, 단지 다른 뭇엇을 위한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도덕법칙은 어떤 행위가 바람직한 목적의 수단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선한 것이기에 그 행위를 명령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도덕법칙(가언명령, 선언명령)은 보편성과 타당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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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 흐름을 보면 알겠지만 나의 생각은 도덕적 기준은 경험 이전에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 도덕기준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역지사지를 나와 타인의 범위로 한정하지 않고 나와 다수, 다수와 다수로 확장하여 생각해 보면 어떨까? 또 얼마전에 읽은 책에서 어떠한 결정을 할때 여러문제가 있다면 주변의 상황을 배재하고 그 상황 자체로만으로 판단한다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적다는 글을 읽었다. 그것이 정언 명령이 아닐까? 우리가 오늘 어떤 사람을 회사일로 만나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여러 질문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긴다.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 ”지금 피곤한데.”, ”아래 직원을 시킬까?”, ”그 사람을 만나면 저녁에 드라마를 놓치지는 않을까?”, ”저녁에 비가 온다는데.”, ”안만나면 사람들이 나를 불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등등…… 이러한 여러 질문 중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단지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 하나다. 나머지는 정언명령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 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대부분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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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중간에 이런 말이 나온다.

문제 제기는 중요하지만 대답은 그리 급하지 않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급한 마음도 생겼었다. 하지만 지금 답안지에 답을 적을 생각은 없다. 더욱 고민해 볼 생각이다. 아직 시험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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