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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百合ヶ丘店
South Bound
投稿日:2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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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남쪽으로 튀어!’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소설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오쿠다 히데오의 장편소설 ‘남쪽으로 튀어’는 12살짜리 소년 지로를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성장 소설이다.
여느 성장소설의 정석처럼 흐름이 되는 인물들, 예를 들어 인생의 위기를 처음 느끼게 하는 가쓰라던가 가족의 비밀을 알고 있는 누나, 그리고 아키라, 그리고 큰 몸집으로 표현되며 위대하지만 어린이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는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
시모무라 고진의 ‘지로 이야기’라던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쫒는 아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보단 이 책을 이끌고 가는 핵심 인물은 아버지가 된다.
성장소설의 이 같은 맥락은 아버지라는 존재, 즉, 위대하면서도 무서운, 그리고 언제나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인생의 나침반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냉정하고 때로는 따뜻한 존재…그리고 우리의 인생에서 본보기가 되고 나와 가장 가깝지만 왠지 멀리 느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우에하라 이치로라는 인물은 주인공 지로와 닮았지만 왠지 딴 나라 사람이다.
지로의 눈에는 항상 문제투성이이고 무능력한 아버지가 좋을 리가 없다.
미나미 선생님을 괴롭히고 동네를 항상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아 얼굴을 못 들게 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우에하라 이치로는 어느 만화책에서 불쑥 나올듯한 캐릭터(나는 왠지 슬렘 덩크의강백호가 떠 오른다)로 엉뚱하고 유쾌하다.
종래 과격 운동권이자 그 세상에선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인물….
반정부주의를 개인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그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쫒겨나는 신세가 되지만 소년 지로에게는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만화 주인공 같이 엉뚱한 이치로의 말에는 왠지 모를 카리스마가 존재 한다.
그러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그의 행동에 응원을 보낸다.
거대한 적에 맞써 싸우는 모습에 대리만족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의 내용 또한 읽기 쉽고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니 박자가 잘 짜여 져있다.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이 책을 다 읽었더라면 기분 좋게 책을 덮었을 것이다.
위에도 말했지만, 그냥 만화 같은 캐릭터의 이야기이니깐 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니깐.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가볍지가 않다.
이 소설자체를 ‘상식’이라는 눈으로 본다면 너무나 극단적인 이치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진다.
혹시 자신 주위에 이런 인물이 가족 내지 친적, 또는 친구로 존재 한다면 과연 그를 응원 했을까?
세금은 안내지..애들 학교는 안 보내지..자기 자신의 세계관으로 가족들과 결국 헤어지게 되는 인간을 결코 반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과 그리고 자신과 찰떡궁합인 사쿠라부인의 행동은 아이들을 두고 볼 때는 분명히 문제가 많은 부부임에 틀림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다만 그 권리를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강요 했을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면.. 인간은 혼자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자유를 외치고, 자연주의를 지향하고, 반정부주의와 반국가주의라고 할 지라도 세상의 흐름이란 수 천년,아니 수 만년전부터 선조의 경험에서 비롯되어 온 것이다.
먼 옛날에는 공공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원시 공산제 였다. 이것이 변화하여 노예소유주와 노예라는 두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노예제 사회가 되었고,다시 봉건영주와 영노라는 두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 사회로 변화 했다.
봉건제사회는 그 후 자본주의 사회로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자본주의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인간들이 엉키고 설키며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과거,현재,미래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 엉키고 설키는 역사는 우헤하라 이치로가 말한대로 누군가에 의해 어렵사리 바뀌어 온 사회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시대의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조상들의 역사 속에서 혁명이라는 것은 수많은 오류들을 진실로 이끌었을 것이고, 좀 더 인간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스코트랜드가 13세기 영국왕의 폭정에 시달리던 때 스코틀랜드 영웅 ‘윌리엄’은 자유를 외치며 투쟁 하였으며, 노예제의 반대와 평등이란 이름으로 남북전쟁이 일어 났으며, 테러리스트인지 혁명가인지 아직 논란이 끊어지지 않는 체코의 영웅,체 게베라, 최 현대식의 메커니즘을 누리게 해 준 스티브 잡스까지… 역사적이든 문화적이든 문학적이든 그 시대의 비상식적인 혁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것이다.
오늘이 어제의 미래였고 내일의 과거였듯이 그렇게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고 그 선봉에는 누군가의 혁명적인 활동이 큰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노예제가 봉건제로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그리고 또 우리가 모르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볼 때는 사실 앞으로 어떤 사상이 올바른 건지 판단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치로가 외치는 주의가 올바를수도 아님 완전히 세상을 꺼꾸로 가는 건지도 우리가 판단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절대적 진리’라는 것, 즉 무조건 올바른 인식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책 속의 우헤하라 이치로는 이런 것에 주관적인 주체의식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는 다는 그의 말은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음에 과격한 행동을 정당화 시킬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앞 뒤가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의 행동은 너무나 일괄적이라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건 단지 우리와 세계관이 다를 뿐, 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지로를 향해 던진 ‘네 마음대로 판단해서 살아라. 나 같이 살 필요는 없다’라는 말에서 그는 그 만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경험해 온 삶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람 저마다 각자 틀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세계관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분명 자신의 일에 있어서 주체성과 정당성을 믿고 있을 것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역사가 모든 것을 판단 할 것이라는 그의 말엔 그 만의 신념이 있어서 일 것이며, 자신의 경험상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신념이 없다면 역사를 운운하는 자신감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역사의 증명으로 지탄 받아야 마땅한 아돌프 히틀러도 잘 못 되었지언정 자신만의 신념이 존재 했을 것이다.
이렇듯 사람은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 하기가 어렵고, 사실 판단이 된다 할 지라도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테면 뉴턴 역학은 19세기 말까지 자연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완전한 이론, 궁극의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운동과 같은 아주 미세한 세계의 운동에는 뉴턴 역학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양자론이라는 것이 새롭게 태어났다.
이것은 뉴턴 역학의 절대성이 부인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뉴턴 역학의 진리성 모두가 부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연의 어떤 일정한 범위에서는 뉴턴 역학이 여전히 올바르고 유용하며, 그 범위 안에서는 절대적 진리성의 일부분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부분은 뉴턴 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과학의 반전은 이렇게 추진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 또한 한번 획득되면 언제까지나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불충분함을 자각하면서 한층 전면적인 인식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그 인식을 현실의 발전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전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에하라 이치로.
그는 분명 나와는 정반대의 세계관과 진리를 보는 눈이 확연히 다른 사람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설이나 만화가 아닌 현실에서의 이런 존재는 절대로 동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숨어서 박수만 치거나 응원만 하거나 비판만 하는 사람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는 그의 행동은 나 보다는 몇 배는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
옳던 옳지 않던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관과 인생의 목적이 뚜렷한 것은 부럽기까지 하다.
뉴턴의 역학같이 그의 사상이 절대적 진리이지는 않다.
그러나 세상을 만들어 가는 흐름에서 불충분함을 자각시켜 발전시키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나와는 너무 다르지만 그에게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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