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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宮店
「サルトル」 嘔吐
投稿日:201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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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存主義では人間はただこの世に投げ出された存在であり、存在が本質より優先するものだと言っている。人間の人生は本当になんの目的もなく世の中に投げ出された何の意味もない偶然なるものなのか?
嘔吐をよみながら疲れて偶然テレビのリモコンを持って1番のNHKを押した。愛媛県から高知県を流れる1級河川「 仁淀川の神秘に迫る!」という番組がやっていた。仁淀川に生殖する生物に関する番組をみながら、自分も知らず自然のあんまりにも美しさに画面に釘付けになり、息を潜めてテレビを見ていた。
川の周辺の小さい魚と小さい鳥たち、蛍のような色々な形と色の昆虫、そして僕の小さい目にも見えないぐらいの小さな生物たちまで神秘な自然の摂理によって各自の美しさをいじしながら、完璧な生態系のピラミットを維持していた。
その美しい自然の中には人間の思想、哲学、または科学のような文明のものが入り込む隙間が無い程度言葉で表現できない美しさでそのまま数千年間もそこに存在していた。
なのであればこんなにも美しい自然の摂理は本質(目的)が優先して誰かによって作られたものなのか? あるいはただそこにいつかからずっとそのまま存在していたのか?
私達の周辺を囲んでいる森羅万象の全てのものごとが偶然できたと考えるには信じられないぐらい美しい自然の摂理は科学では未だに説明できない未知の領域が存在している。そしてその背後には神様のような見えない神秘な力が存在す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た。
美しい自然の存在というのは何のためのものなのか?数億年も前に宇宙のカオスの爆発によって偶然宇宙のくず達が結合し地球が生まれ、陸地と海に別れ偶然に自然の進化により今の万物が出来たのか?
現在の人間の知能では万物の本質を解明することは出来ないが万物に本質があるのであれば、もしかしたら人間もそれと同じように本質的適用できるものではないかと思った。
つまり、自然と同様人間もある目的性を持ってこの世に被投された存在であること。
行動派 実存主義のサルトルを受け入れられる個人的な理由としては人間はただ偶然に生まれたという虚無主義にとどまらないということだ。
自分が自分の本質を作っていくのも自分の選択であり、実存は状態ではなく行為であり、色いろんなものの中から選択して、その選択されたものが集まりその人を決定するのだ。私たちが選択するものとして価値を創造するものだと話していることだ。
しかし「存在は本質より優先する」ということは自分にとって嘔吐と同じようなことだと思った。それは「ただ君は偶然生まれた者なんだから、そのまま生きろ。」と自分に言っているような気がして嘔吐なような不条理を感じる。
サルトルの実践的実存主義で言う人々は皆明るい未来を自分で作っていく為に完全なる自由と自身の責任で物事を選択していくということはあんまりにも楽観論的な考え方ではないか? 「本質が存在より優先する」という言葉で、人間が不変なる本質を持ってこの世に生まれたと仮定しても結局のところ自分自身の人生の意味と目的を探して行かなくていけないのは人間個人個人の人生を通しての永遠なる課題であるものだと思う。
まだ、大体の人間は自分自身を自進、自発的に変化、発展させながら究極的に人生の目的を探して行けるほど賢明な人々はそんなに多くない。多くの人々はただ幸せに自分の快楽を追及しながら、衣、食、住に全ての努力を費やし生きて行くことを願っているだけだ。
それで人間はある普遍の本質を持ってこの世に生まれたと仮定し、各自の自由意志により本質を創造するのはなく、人間自ら自分に与えられた本質を探して行くのが私達の人生だと思う。
自分自身も今は世の中に投げ出された1人の人間として生きているが、自分が生まれた本質を探して行くことがこれからの人生だと思った。
なので自分にとって嘔吐のような「存在は本質に優先する」という言葉より「本質が存在に優先する」ということだと自分は信じたい。
神様が本当にいるかどうかは自分自身もはっきり証明できない。
しかし、神様がもしかしてNHKでみたそんな美しい万物に各自の本質的な意味を付与したとしたら、明日の人生はより希望に満ち溢れるのではないか?
自分はそう信じたい。それが自分の明日をより希望的にしてくれるから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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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은 그저 이세상 내 던져진 존재일뿐, 존재가 본질보다 우선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과연 목적없이 세상에 던져진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우연적인 존재일까?
구토를 읽다 지쳐 우연히 TV리모콘을 들고 채널 1번NHK를 눌렀다.
일본에서 최고로 깨끗한 수질을 자랑하는 요도카와에 서식하는 생물에 관한 다큐멘터리 방송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시간 동안 넋을 잃고 숨을 죽이고 TV를 쳐다 보았다.
강주변의 작은 물고기과 작은 새들. 반딧불과 같은 형형색색의 곤충들. 그리고 나의 작은 눈으로 보일까 말까한 미세한 미생물들 까지 신비한 자연의 섭리에 의해 각자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완벽한 생태계 피라미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는 인간의 사상, 철학, 또는 과학과 같은 문명의 이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형언할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그렇게 수천년 전부터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는 본질(목적)이 우선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까?아니면 그곳에 그냥 언제인가 부터 계속 그렇게 존재 했던 것일까?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하기에는 믿을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는 도저히 과학으로는 해명할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신과 같은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의 신비로운 힘이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다시한번 해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의 존재는 그 무엇을 위한 것일까? 몇억년전에 우주의 카오스에 의해서 우연히 우주의 먼지들이 결합하여 지구가 생겨나고, 육지와 바다가 생겨나서 우연히 자연의 진화로 인해 지금의 만물이 생겨난 것일까?
현재 인간의 지능으로는 만물의 본질을 해명 할 수는 없지만 만물에게 본질이 있다면, 혹시 인간도 그와 같은 본질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라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즉, 자연과 같이 인간도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세상에 피투 되어진 존재라는 것.
행동파 실존주의 선두주자 사르트르에 그나마 정이가는것이 인간이 그저 세상에 우연히 태어났다는 허무주의에서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가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라고 한다. 실존은 상태가 아니라 행위이며, 여러가지 중에서 선택을하고, 그 선택된 것들이 모여서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으로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존재는 본질에 우선한다.]라는 명제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는 구토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그저 너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이니깐 그냥 그대로 살아.”라고 나에게 말하는것 같아 구토와 같은 부조리를 느낀다.
사르트르의 실천적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밝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하여 완전한 자유와 자신의 책임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너무 낙관론적인 생각이 아닐까?
[본질이 존재에 우선한다.]라는 명제로, 인간이 불변의 본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더라고 결국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가야 하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삶을 통한 영원한 숙제이다.
아직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진,자발적으로 변화,발전 시켜가며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찾아 갈수 있을 정도로 현명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행복하게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의식주에 모든 노력을 투자하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불변의 본질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가정하고, 각자의 자유의지에 의해 본질을 창조하는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본질을 찾아나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 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지금은 비록 세상에 피투 되어진 한 인간의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태어난 본질을 찾아나아가는 것이 앞으로의 삶이다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구토와 같은 [존재는 본질에 우선한다.]라는 명제보다는 [본질이 존재에 우선한다.] 라고 나는 믿고 싶다.
신이 아직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 신이 우리 자신에게, NHK에서 보았던 그런 아름다운 자연들에게 각자의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면, 내일의 삶이 더욱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게 나를 더 희망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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